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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비극 3부작 -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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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380회 작성일 19-07-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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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비극 3부작 - 소포클레스

-프레임으로 바라본 세상과 비극의 필연성-

 

이규섭

 

비극적인 삶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개개인이 마주하는, 인류가 마주하는 크고 작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때 마다 우리는 이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일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역사가 돌고 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왜 늘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한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일까?

우리는 사건의 비극성이 피해의 정도나 사건의 원인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사건의 원인이 피해자와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때, 사건 자체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비극성은 더욱 심화된다. 전쟁이나 범죄, 자연재해로 인한 대규모 피해에 우리가 비극성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 논리적인 설명의 범주를 상당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이런 비논리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발생 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지적 수준과 문명 발달의 한계인가? 단지 발전수준의 한계가 비극의 원인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가슴 아프게 하는 현실의 비극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줄어들고, 해결되어야 하며, 같은 비극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수 백년 전과 비교하더라도 인류의 비극은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비극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교훈삼아 다음을 대비할 수 있는 유형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는 왜 비극에 주목하는 것인가?

세상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지만,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인간의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인간과 세상 사이에는 프레임이라는 필터가 존재하며, 인간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그 안에서 구분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존재와 관념들을 인간의 이성이 처리 할수 있는 형태의 정보로 변환시키려면 그들을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해석하여 줄 프레임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한다. 인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존재는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며, 그럼에도 프레임 없이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성조차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정한 하나의 프레임에 불과할지 모른다. 세상에 혼재해 있는 개념들을 특정한 프레임을 통해 이해 가능한 형태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간을 고도의 문명으로 이끈 가장 큰 무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무기는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남과 여, 선과 악, 나와 너, 이학과 문학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프레임으로 분리된 세상의 일부이다. 하지만 언뜻 보기엔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것들도 실제로는 구분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identity와 생물학적으로 정의한 identity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가 성소수자의 탄압이라는 비극을 낳았고, 선과 악의 구분이 인간을 서로가 선의 입장에서 서로를 악으로 바라보고 싸우게 하는 비극을 끊임없이 낳고 있다. 자아의 존재는 스스로의 타자성으로부터 성립되며, 이학과 문학은 각각 이성과 감성을 대표하는 학문이지만 어디 까지가 이성의 영역이며, 어디까지가 감성의 영역인지 모호하다. 반드시 둘로 쪼개는 흑백논리의 양상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산재해 있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고 특정한 구조의 프레임 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듯 정형화된 프레임은 실제 세상에 적용했을 때 반드시 크고 작은 모순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순은 혼란을 만들고 그 혼란이 모여 비극이 일어난다.

오이디푸스는 ‘자연과 인간이 혼재한 개념’의 표상인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도시를 구했다. 그는 “말”로써 자연과 인간을 구분 지었고, 이는 그를 성공된 삶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말로에는 결국 자신의 윤리관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말은 인간만이 가진 도구다. 인간이 가진, 인간이 버릴 수 없는 ‘도구’로 인해 풍요로운 세상을 살게 되지만, 결국 그 ‘도구’가 가진 한계성과 모순성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비극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가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의 폐륜을 저질렀기 때문이고, 안티고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 것이 죽은 오빠를 묻어주는 개인의 신념을 위해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며, 크레온 왕이 비극을 맞이한 것이 법을 앞세워 인도에 어긋난 짓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면, 비극이란 것이 그토록 명료하고 단순한 것이었다면, 우리사회의 수많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이 잘못을 저질렀기에 비극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비극은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필연적인 것이기에 더욱 비극적이고 괴롭다. 윤리가 인간의 프레임이 한정하는 합리성 내에서 형성된 척도이기에 이를 벗어나려 했던 오이디푸스는 모순에 빠졌다. ‘개인의 윤리적 신념’과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법의 수호’라는 두 가지 척도가 충돌 할 수밖에 없게 설계된 프레임의 한계와 모순성이 안티고네와 크레온 왕의 비극을 만들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 대한 폐륜적인 운명을 듣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한다. 이는 단순히 인간에게 꿈도 희망도 없다는 식의 비극적인 운명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인간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한 인간의 방법론으로는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비극은 인간이 구분 지어놓은 세상이 사실 잘못 구분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온다. 아니 애초에 인간의 프레임으로 세상이 제대로 구분 될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 그 절망적인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테이레시아스는 비극적인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며 이 비극의 원인을 찾는 오이디푸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재앙은 그대로부터"

인간의 비극은 인간으로 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다. 인간은 비극을 위해 세상을 구분지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편의를 위해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구분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인간은 비극에 빠지게 된다.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프레임은 시간과 사람에 따라 계속 바뀌어가며, 각각의 프레임 사이의 충돌로 인한 모순성, 그 자체로서의 모순성이 점차 드러나면서 혼돈을 가져온다. 극단적으로, 만약 오이디푸스가 부친살해가 사유에 의해 정당화되고, 근친이 풍습인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인간의 비극성이 사라질까? 절대 아니다. 프레임이 바뀌면 그에 맞게 형성된 여러 기준에 의해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날 뿐이다. 이는 필연적이며, 앞서 계속 설명했듯 어떤 방식으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분리 될 수 없는 대상을 분리해서 바라보았을 때, 그 간극에서 분리의 모순성이 드러난다. 인간의 프레임은 구분 지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대상들을 구분 짓는 스크래치이고, 이 스크래치가 만드는 모순성들이 모여 비극이 된다. 따라서 비극은 인간이 가지는 한계성과 필연적 모순성의 표상이요 이에 대한 증명이다. 

 프레임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역설적으로 그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 시대 인간의 프레임이 가지는 모순점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비극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돌아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개개인들이 크고 작은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어떤 프레임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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