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전환을 공부하던 물리학도, 대북 협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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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전환을 공부하던 물리학도,
대북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다
* 강호제 저, 『과학기술로 북한 읽기 1』, RPScience, 2016
북한의 과학기술 정책은 곧 그들의 '주체 사상'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그 이유를 요구하면 대답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언뜻 보기엔 중요하게 보이는 것도 근거가 명확하게 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간과하기도 매우 쉽다. 이는 북한을 연구하는 데에도 적용되는 이치이다. 누군가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과학기술 정책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대부분은 이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왜?’라는 질문이 더해지면 명쾌한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강호제 박사는 그의 저서 『과학기술로 북한 읽기 1』에서 과학기술 발전의 성과가 곧 북한의 ‘주체사상’의 확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물리학과 졸업’이라는, 북한 연구자로서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그가 바라본 북한의 모습과 그러한 북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북한과의 협력 양상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남한은 과학기술, 북한은 자원’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북한의 과학기술과 주체사상
이야기의 서두는 1946년 유학길을 앞둔 299명의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아는 공산주의자가 되어라’라고 조언한 김일성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2쪽) 당시 일제는 조선인이 과학을 공부할 기회를 교묘하고 철저하게 차단해왔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향후 북한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할 학생들에게 정치학이나 사상이 아닌 과학기술을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은 당시의 시선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북 지도부는 앞으로 경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과학기술자들의 월북을 유도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남한 내의 미군정청은 서울 시내의 각종 단과대학을 묶어버리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시켜 버리는 등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남한의 배척력에 힘입어 과학기술자 월북 유도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13쪽) 당시 월북했던 리승기, 도상록 등의 학자들은 이후 북한 과학기술계의 초석을 닦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또한, 강 박사는 책에서 꾸준히 ‘주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북은 ‘주체사상’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국가 지향으로 삼고 있다. ‘주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55년 김일성의 당 선전선동 일군들 앞에서 했던 연설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단지 남의 것만 좋은 줄 알고 우리의 것을 폄하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이때의 주체는 오히려 ‘정체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컸다. 하지만 이는 자칫 ‘수정주의적 편향’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고, 당시 이러한 비판을 이겨낼 구체적인 근거를 마련할 능력이 없었던 북은 이후 1960년대까지 ‘주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 바로 과학기술 분야였다. (69쪽) 화학공학, 제철 등의 국가 기간산업에서 원료, 기술, 인적 자원의 자립을 이루어내고, 이를 포석으로 경제적 자립을 확립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에서 주체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고, 주체적인 것이 곧 과학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성과가 없었다면 다소 추상적인 개념인 ‘주체’는 실질적 의미를 부여받기 어려웠을 것이며, 따라서 북한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북한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지는 이 책의 전체적인 메시지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여기에 주체의 개념을 확립한 북한의 과학기술의 성과로 강 박사는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비날론과 제철 : 원료, 기술의 자립으로 주체사상의 포석을 놓다
첫 번째는 ‘비날론’ 섬유의 공업화이다. (142쪽) 비날론은 리승기 박사가 일제 강점기에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월북 이후 공업화에 성공한 합성섬유이다. 당시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나일론’에 버금가는 섬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석유에서 생산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회석에서 합성되었기에 원료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북은 이러한 성과를 위에서 언급했던 ‘주체’를 확립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판단했다. 리승기 박사는 자연스럽게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에 걸맞게 북의 대우도 매우 극진했다.
두 번째는 코크스 없는 제철법의 확립이다. 철은 반응성이 큰 금속이기 때문에 공기 중의 산소 원자와 결합하는 ‘산화’ 반응을 잘 한다. 따라서 실제로 광산에서 발견되는 철광석은 철에 산소가 결합한 산화철의 형태이다. 이것을 우리가 원하는 철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합한 산소를 제거하는 ‘환원’ 과정이 필요한데 여기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코크스이다. 코크스는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검은 물질인데, 이것이 철광석에 있는 산소와 반응하면서 일산화탄소 기체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1955년, 김책제철소에서는 김책공대 출신의 ‘주종명’이라는 사람의 지휘 아래에서 새로운 제철공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철강재가 없이는 기간산업을 유지할 수가 없는데, 제철에 꼭 필요한 코크스는 북한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100% 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철 과정에서 코크스 대신 똑같이 탄소가 주성분이면서도 북한에 풍부한 무연탄을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한 번은 재료의 배합비율 조절의 실패로 용광로가 멈춰버리는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종명을 잠시 국제휴양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168쪽)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다 보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실수에 관대해지지 않으면 과감히 도전할 과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1958년 주종명은 무연탄을 이용하는 제철법을 완성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는 북이 제1차 5개 년계획을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기한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169쪽)
북한의 과학기술의 특징과 향후 대북 정책의 방향
강 박사는 북한에서의 ‘과학기술’이란 단순한 지식의 수준이 아닌 ‘생산력’을 키우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177쪽) 좋은 논문을 투고하고 노벨상을 노려볼 수 있는 과학자를 양성하는 것 못지않게, 공장 제품의 높은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과학기술 정책은 경제발전 전략에서 절대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강 박사는 기존의 북한 연구에서 과학기술의 이러한 측면이 간과되고 있었던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북한이 IT기술을 강조하는 의도가 공장의 자동화를 위한 것임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나 (209쪽), CNC(컴퓨터 수치제어: 컴퓨터의 힘으로 정확한 수치를 가지고 기계의 움직임을 제어하여 정밀부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의 강조에 과학기술을 이용한 경제 발전 전략을 꾀하려는 속내가 숨어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217쪽) 이를 단순히 김정은 선전용으로만 해석해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남한의 과학기술은 세계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특히 제철, 반도체, 원자력 등의 분야는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다. 반면 사람들은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북한의 과학기술을 남한보다 전반적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북한이라고 하면 불이 환하게 밝혀진 남한과 어두컴컴한 북한을 찍은 위성사진을 떠올리는 등 우리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2007년 수준에서 멈추어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2012년 김정은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북한의 발전 속도와 양상은 급격하게 달라졌으며, 고도의 군수공업을 등에 업고 ‘Spin-off’ 전략을 통해 경제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과의 협력 모델은 남한의 기술력과 북한의 자원 그리고 노동력을 이용하자는 것이 대세였다.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강 박사는 오히려 우리가 북한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308쪽)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북한의 과학기술은 철저히 현장 지향적이다. 거기에 그들이 처했던 독특한 환경 때문에 북한은 가격 경쟁력이 충분한 기술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기술 중에서 쓸만한 것을 잘 추려내어, 북한이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남한의 자본과 마케팅을 결합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합한 모델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는 남한에게도 일자리 부족이나 중소기업 육성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덧붙인다.
강 박사의 위와 같은 방법론은 신빙성 있는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기인하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시장 진입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다. 남한의 기술을 가지고 진입전략을 구상하는 것은 당사자가 기술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북한의 기술을 아이템으로 사용할 경우, 북한이 자신들이 애써 개발한 기술의 많은 부분을 공유해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부담을 안고 해외 시장으로 진입하게 되면,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매니지먼트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최소한 매우 신선하고 파격적인 접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쪼록, 남한과 북한이 서로 효율적인 win-win 전략을 잘 구상하여 강한 시너지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평화를 향한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이 책처럼 북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신선한 방향의 접근이 가미된 저서가 앞으로도 더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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