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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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폴 칼라니티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당신은 언젠가 죽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말을 건네는 상대방이 괘씸해서도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초연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있는 ‘언젠가’라는 단어의 모호함에 있다. 이 단어 때문에 죽음은 나와는 시간적으로나 확률적으로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산다는 것만큼이나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누군가 다시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3년안에 죽을 수 있습니다.” ‘내가 3년안에 죽을 수 있다고?’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억울함이 밀려온다. 억울함의 근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자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판단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세상이 나를 대단하다고 느낀 들, 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 없는 위인들이 때로는 고된 길을 자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치관이란 이런 것이다. 남들이 탐하는 것에 정작 나는 무심할 수 있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는 세상이 관심 없을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나에게 자문한다. 너가 지금까지의 삶으로 얻은 가치관은 무엇인지. 내가 3년안에 죽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억울하다면, 적어도 그 억울한 이유라도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현재에 가치를 두지 못하는 지, 더 완성된 나의 모습을 바라면서 내가 지금까지 참아왔다고 믿는다면 그 완성된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폴 칼라니티’는 스스로 자신이 걸어갈 삶의 밑그림을 그리고, 여러 경험들을 통해 고쳐나가고, 이제 막 화려한 물감으로 색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생물학, 도덕, 철학, 문학의 연결점인 ‘의학’에서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잡히고, 세계 속의 자신의 자리를 잡아갔다. 그 역시 자신의 인생의 ‘정점을 향해 가던 참’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모습은 뿌리깊은 근본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에, 유한함 앞에 선다. 자신의 근본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켜켜이 쌓아나간 성숙된 정신이 죽음을 앞둔 것이다.
루시와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울었다. CT 촬영 결과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떠 있었고, 의사로서의 내 정체성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암은 여러 내장 기관들에 침투해 있었고, 진단은 명확했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그렇기에 그는 죽어가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끝의 시작이 아닌 시작의 끝일 뿐이었다. 지독한 병세에도 끊임없는 재활을 통해 다시 수술대에 설 수 있었다. 6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레지던트 생활도 결국 마칠 수 있었다. 의사이자 환자였기에, 그는 바랐던 의사의 역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또한 그에겐 행운이었다.
신경외과의를 겸한 신경과학자로 가장 높이 날아오르려던 욕심을 버린다면,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아버지가 되는 것?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 후학을 가르치는 것?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신체 또한 자신의 근간이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더이상 수술대에 오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라는 그의 표현에서 아직 오르기를 열망하는 뜨거운 영혼이 보인다. 한계에 부쳐 더이상 전진할 수 없는 그가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이었다. 글의 위대한 힘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이 책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가 간직하고 있던 인생의 의미는 책을 통해, 바다건너 나에게까지 옮겨왔다. 폴의 숨결이 바람이 되어 말이다.
손이 부르트고 도저히 붓을 잡을 힘이 없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비로소 완성했다. 딸 케이시는 아빠의 그림을 보고 배시시 웃는다. 36세의 젊은 아버지 폴 칼라니티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과 함께 잠든다.
사람을 완성하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에 비유한다면, 가치관은 밑그림에 해당한다. 고백하건데, 나는 내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이에 대한 해결점 또한 마땅히 찾지 못했다. 여기서 오는 불안감은 아마 돈, 명예와 같은 세상과 나 사이의 지표와는 무관할 것이다. 불현듯 나는 그리기를 밑그림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되어보고자 색칠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작은 부분만을 협소하게 바라보며 색칠하는 일만 반복하다가 전체 그림이 부자연스러워진 것과 같은 이치일까. 내 안에서 여러 가치관들이 충돌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모두 지워버리자. 나에게 알맞는 도화지 크기부터 다시 찾아보자. 전체를 보아야 한다. 나는 이곳에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할까? 어렵겠지만 흰색의 무구함에 두근대는 나의 20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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