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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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적적인 불안
-다자이 오사무의「인간 실격」을 읽고-
인간 실격?
굉장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인간이기 위한 자격’이란 무엇일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아닐 수 있을까?
같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본디 사유하는 것에서 삶의 목적을 찾고, 그 목적을 실현해내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기 위한 자격’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자격이 부여되는 구체적인 시점과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어른’이라는 호칭에 막중한 책임과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
또 한편으로,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 자신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규격화된 개인들이 모여 ‘인간 세계’라는 공고한 사회는 유지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때로 세상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 세계로부터 온전히 소외되는 것에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작가는 우리가 스스로 설명하기조차 힘든 이 모순되고도 절박한 본심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듯 하다.
주인공인 요조는 인간 세계에 소속되기 위한 요령을 배우지 못 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늘 알 듯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인간이었기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익살’이라는 가면을 통해 숨기는 노력을 보인다.
본인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가면을 쓰며 철저한 연기로 인간과 먼 거리를 두는 것, 그렇게함으로써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이것이 요조가 불가해한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 작품 中 -
본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연기를 하며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이 요조가 불가해한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요조가 선택한 ‘익살’이라는 생존 전략은 사실 우리 모두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피하기 위해, 우리 역시 고립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적절한 가면을 골라 쓰고 있지 않는가.
요조의 처절한 서비스는 사회를 등지는 것이 두려운 인간 본연의 나약함을 투영한다.
요조는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다.
하지만 때로 기성세대의 질서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작품 속 요조는 끝까지 인간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부모에게서, 인간 세계(사회)에 소속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요조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익살’을 통해 숨기는 노력을 보인다.
하지만 요조는 동거녀 시스코와 그녀의 딸 세게코 사이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갈 즈음에,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때까지 요조는 ‘인간 세계’를 거대한 공동체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며, 그렇기에 그 집단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공포를 가졌던 것이었다.
그는 작품의 말미에 삶에 행복도 불행도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에서 소외된 그는 끝까지 동화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행복도 불행도 없다고 고백하며, 인간 실격자가 되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긍정적 불안
무엇이 요조를 인간 실격자로 만들었을까.
그의 삶은 늘 불안과 함께였다.
그의 불안은 단순히 예민한 성격 탓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등지는 것에서 기인한 공포에 가깝다. 요조에게는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타인과의 거리감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없었고, 기본적인 감정의 부재로 인해 결국 ‘사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았다.
즉, 그의 사유는 ‘어떻게 하면 소속될 수 있는가’라는 결과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그에게 소외란, 존재의 부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디 사유하며 목적을 찾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의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요조가 ‘소속’에 대한 결과론적인 두려움보다, ‘왜 소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전제에 대해 불안감을 보였다면 어떠했을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그 이면의 원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는 사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긍정적인 불안’에 가깝다.
이러한 종류의 불안은 결코 부정적인 결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는 긍정적인 자질로 평가받는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론을 제기하고 세상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첫걸음은 언제나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요조의 불안이 자기를 파괴하는 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 달리, 불안의 기인을 본질과 구조로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성장의 동력이 된다.
결국 나의 불안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사유를 이끌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요조는 행복도 불행도 없다는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아비규환 같던 인간 세계에서 그가 발견한 마지막 진리는 역설적이게도 이 허무한 평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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