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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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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준
댓글 0건 조회 550회 작성일 26-02-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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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정세랑 작가의 책은 참 묘하다. 이전에도 이 작가의 작품을 독후감으로 작성한 적이 있다. 서점에서 슬쩍 들춰보기만 해도 어느새 몇 페이지를 훌쩍 넘기게 된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편한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이번에 읽은 ‘재인, 재욱, 재훈‘도 그랬다. 하지만 이 소설이 유독 내 마음에 들어왔던 것은 소설 속 삼 남매의 초능력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실제 배경 때문이었다.


   작가의 실제 고등학교 친구 이름이 '재인'이고, 그 둘이 출석 번호 33번과 34번으로 만나 단짝이 되었다는 일화. 나는 이 대목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얻는 방식이 이토록 싱겁고 무심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면서도 깨달음이 되었다. 우리는 인생의 큰 행운을 얻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거나 거창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지만, 정작 나를 평생 웃게 해줄 존재는 그저 '교실 뒷자리'라는 우연이 툭 던져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사귀는 게 참 피곤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른이 된 후의 인간관계는 마치 정교하게 짜인 비즈니스 같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지, 혹은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할지 본능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이해관계'라는 복잡한 필터가 우리 사이에 겹겹이 쌓여있다 보니,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고 나를 보여주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학창 시절은 어땠나?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의 공기를 떠올려봤다. 그때 우리는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복잡한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저 앞번호라서, 같은 동네라서, 혹은 체육 시간에 같이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마음을 나누었다. 이해관계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무구한 시절, 그 투명한 상태에서 맺어진 인연이기에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된다. 33번과 34번의 만남이 소중한 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나란히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던 그 시절의 순수함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재인, 재욱, 재훈 삼 남매가 가진 초능력은 사실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미미하다. 하지만 정세랑 작가는 이 사소한 힘들을 모아 기어코 세상을 구한다. 대단한 권력이나 압도적인 무기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는 작은 관심과 다정함이 멸망을 막는 열쇠가 된다는 전개는 작가의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건 작가와 친구 재인의 관계와도 닮아있다. 33번과 34번이라는 우연이 맺어준 인연 속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건넸을 수만 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과 다정한 눈빛들이 결국 이 따뜻한 소설을 낳았을 것이다. 거창한 이유 없이 곁에 머물렀던 친구가 사실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구원자가 되어주는 것. 소설은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아름다운 기적을 '초능력'이라는 옷을 입혀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옆자리를 지켜줬던 수많은 '번호'들이 생각났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도 그저 나란히 앉아 매점을 가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졸음을 참던 친구들. 어른이 되어 사회적 가면을 쓰고 고군분투하는 지금, 그 시절의 무조건적인 연대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정세랑의 소설이 쉽게 읽히는 이유는 우리 가슴 속에 숨겨둔 이런 그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건드리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며 자꾸만 특별한 존재가 되려 애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어"라고 토닥여준다. 출석 번호가 나란했다는 그 사소한 우연이 인생의 보물이 되듯, 우리 삶의 평범한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빛나는 조각들이라고 말해준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은 독후감을 쓰고 나면 항상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진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지쳐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인생의 소중한 인연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게 아니라, 다정한 우연이 예고 없이 배달해주는 선물임을 믿어보기로 했다.

   오늘 퇴근길에는 오래전 가까웠던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전화를 해보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결혼을 하면서, 서로 또 아이를 나으면서 가까웠던 친구들과 자주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어떤 이해관계가 없어도 괜찮다. 우리가 그때 나란히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서로를 구원한 사이일 테니까. 전화 안 받으면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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