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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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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5,367회 작성일 19-05-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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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낯선 것들을 경계하거나 무서워한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중립적인 인식'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운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변모한다. 늘상 위협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야생의 세계에서 낯선 존재를 향한 본능적인 경계는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문명화된 현대 사회는 야생의 사회와 다르다. 문명 사회는 오히려 공동체원들에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 속에서의 화합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여전히 본능적으로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며, 이러한 거부감이 특정 문화 집단에 대해 드러날 때 우리는 이를 제노포비아라 부른다. 


제노포비아 (Xenophobia)는 그리스어 제노스(Xenos:  낯선, 이방의)와 포보스(Phobos: 두려움)이 합쳐진 단어로 낯선 문화나 인종, 집단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을 칭한다. 제노포비아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타 민족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문명인, 이웃 민족을 야만인으로 정의하면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낯선 민족들의 문화를 야만적이다 무시하였으며, 낯선 종족들이 야만적인 이유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야만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고, 이에 그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며 자신들의 노예제를 정당화하였다. 


현대의 관점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오만하고 인종차별주의적이다 비난하지만, 자신과 다른 이들의 문제를 그들의 본질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비단 그리스인들에게 국한된 모습이 아니다. 비난과 혐오가 넘치는 현시대 대한민국에도 그리스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혐오주의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혐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혐오하는 집단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화합과 공존의 여지 없이 반목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테러하는 집단이라 생각하고,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남성이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 믿는다. 혐오자들에게 좌파는 '본질적으로' 북한과 적화통일을 원하고, 우파는 '본질적으로' 친일파와 매국노들이며, 난민들은 '본질적으로' 범죄를 저지는 자들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자 주장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혐오주의자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이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인식함을 통해 그들의 혐오를 정당화하고, 이러한 혐오주의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집단활동을 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혐오가 보편적인 것이라 인식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인과관계가 있듯이 특정 집단에게 반복된 문제가 발생하는 데에는 분명한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민자들이 국내자들보다 비교적으로 더 자주 범죄를 일으킨다면 우리나라 사회가 그들을 범죄의 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고, 청년세대가 꿈과 소망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부조리한 사회구조가 그들의 희망을 빼앗아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봐야한다. 심지어 혐오주의자들이 특정 집단을 혐오하는 데에도 그들이 받은 교육과 상처가 그들을 혐오주의자로 만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특정 집단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진단하고 고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나누고 이미 익숙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한 불편함을 거부하고 이보다 더 쉬운 길, 즉 자신들에게 낯선 것들을 거부하는 길을 택한다.


소설 '다섯째아이'에서 작가 허셀은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다섯째 아이 '벤'을 한 가정에 불행을 가져다준 원인이자 괴물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 폭력적이고 비사회적인 벤이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다. 이미 잦은 출산으로 심신이 망가진 어머니 해리엇은 벤이 주는 출산의 고통을 저주하고 과도하고 진정제를 복용해 태아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재정적인 한계를 겪고 있던 아버지 데이비드는 벤의 양육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희생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 속에서 태어난 벤은 진정제의 영향인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고, 이러한 벤을 견디지 못한 그의 부모는 그를 반인륜적인 가혹행위가 가득한 정신병원에 보내 원래부터 조금 이상했던 벤을 완전히 괴물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모성애로 인해 해리엇은 벤을 정신병원에서 구출하였지만, 부모와 형제로부터 버림 받는 경험을 한 벤은 이미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결국 벤이 자신을 버린 가정을 등지고 실업자와 강도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을 읽으며 첫번째로 흥미로웠던 점은 벤을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벤을 괴물이나 도깨비와 같은 인간과 다른 괴의한 존재로 여기던 해리엇과 데이비드와는 달리, 벤을 진찰하던 의사도, 벤을 가르친 학교 선생도 벤을 평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아이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실업자 청년들과 불량배 무리는 벤을 자신들의 동료로 받아주었고, 벤은 그들과 함께할 때만큼은 여타 불량배들과 다를바 없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벤의 부모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벤에게 저질렀던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벤을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로 여겼다는 것과, 이러한 부모의 태도가 벤이 가정에서 더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흥미로웠던 점은 해리엇이 가지고 있는 벤을 향한 시선과 사회 부적응자들을 향한 시선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1980년대 영국은 실제로 인종차별과 빈부격차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잦은 무력시위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소설 속 해리엇은 벤과 그의 부랑자 무리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시위들을 '폭동'이라 칭하며 이러한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 부적응자들을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이들이 일으키는 무력 충돌의 진짜 원인과 사회구조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바라보지 못한채 갈등의 모든 잘못을 시위대에게 넘기는 해리엇의 모습은 그녀가 벤에게 대했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된다. 어쩌면 소설의 작가 레싱은 벤을 다른 자녀들과 차별하고 가정의 모든 문제를 벤에게 전가한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모습을 통해 사회구조의 문제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실업자들과 부랑자들, 인종차별을 당하는 외국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본질적으로' 문제 있다고 말하는 당시 영국 시민들에게 비수를 던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낯선 것들을 경계하거나 무서워한다. 인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년이 넘는 문명의 역사 가운데 다양한 인종과 문화, 언어를 가진 집단들과 공존하면서 번영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에도 여전히 혐오주의가 사회 가운데 만연한 것을 보면 낯섦에서 오는 본능적 부정감의 절대적 세기는 시대가 바뀌어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우리와 같거나 비슷한 대상들을 선호하는 것은 본능적인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어느영역에서든 '다름'이 오히려 자연 현상이며, 자연에서 '똑같은'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드물다. 다름을 부정함은 본능적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혐오가 혐오를 낳는 혐오사회 속에서 개성 없고 가치 없는 획일화됨을 쫒지 않고 서로의 다름과 개성을 인정하는 다양성 사회가 이땅 가운데 속히 오기를, 그리고 내가 먼저 나와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공존하는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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