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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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김태형 저
여느 대학원생과 마찬가지로 해가 떠 있는 것을 보면서 퇴근하는 일이 드물다. 한참 전에 해가 져버린 어두운 퇴근길이지만, 밝게 빛나는 달과 가로등의 불빛 사이를 걸으면 그것들이 하루를 위로해주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일과 운동으로 지친 몸뚱아리를 침대에 뉘이고 나면 잠깐의 평화가 찾아온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의 시간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락하거나 노래를 듣는다. 혹은 친구들의 근황을 살펴보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하루의 노곤함을 달래곤 한다.
칙칙한 기숙사의 배경과는 대조적이게, SNS에 올라온 친구들의 사진은 화려한 여행 사진과 맛집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평소 퇴근이 늦고 자주 연락을 할 수 없어서 친구들의 소식을 SNS를 통해서 확인하지만, 그들의 사진 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가장 멋지고 행복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곳의 일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늦은 퇴근으로 지쳐있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았다고 나를 위안하지만, 그래도 공허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여행을 가거나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SNS에 글을 올린다. 일일이 연락할 수 없는 친구들에게 간접적으로 내 소식을 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글을 올리지만, 친구들이 눌러주는 ‘좋아요’가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왠지 모를 쾌감이 전해진다. 글을 올리면 올릴수록 어느 순간부터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글을 올리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 글을 올리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관심을 원했던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SNS에 행복한 모습을 올리고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고 집착하는 것일까.
칙칙한 기숙사에 누워 SNS를 보았을 때의 기분처럼 내 게시물을 보고 우울감과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말이 최근 신조어로 돌고 있다.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어로 습관처럼 SNS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일상을 부러워하고 본인은 불행하다고 느끼면서 겪는 우울증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본인이 가장 좋고 행복한 모습만 SNS를 통해 보여주니 그 게시물들을 보는 당사자가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인기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아요’가 많고 누가 몇 개의 ‘좋아요’를 받았는지 볼 수 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어버린다.
굳이 SNS에 사진을 올리는 노력을 하면서까지 우리는 왜 타인의 관심을 원하는 것일까. 책 <가짜 자존감을 권하는 사회>에서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SNS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SNS는 자신을 위장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타인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SNS는 실질적으로 외로움을 거의 달래주지 못하며, 자존감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존감의 수준은, 직장에서 일하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 발전과 성취의 정도,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사랑에 빠지는 대상, 배우자, 자녀, 친구와 소통하는 방식, 행복감의 정도 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P. 8
자존감 연구의 대가인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 (Nathaniel Branden)은 자존감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거의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매력적이다. 누가 보아도 단점인 것 같은 것들을 자신의 입으로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내뱉는 사람은 얼마나 멋있는가. 하지만 SNS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아진 사실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 들어 사람들의 자존감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인간적인 기준으로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주의와 스펙중심주의가 만연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경제적인 지표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데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것부터, 학벌이 어떤지 묻는 것까지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경제적인 것으로 평가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돈이 많은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인정받지도 못한다. 이러한 이유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기저 속에서 자존감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아이 때부터 자존감의 뿌리가 손상된 채로 자란다는 것이다. 높은 자존감은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던 경험들에 의해 형성된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던지 그것들을 아무 조건 없이 수용해주고 사랑해주는 부모의 모습에서 아이의 강한 자존감이 형성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이러한 기억은 아이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최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교 성적으로 평가받고,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한다. 부모가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하면 그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성적을 잘 받아야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한다. 이렇게 ‘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올바른 자존감이 형성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유년기부터 자존감이 손상된 채로 자라나는 것이다.
‘청년 세대가 어렸을 때에는 주로 부모들이 그들의 자존감을 뿌리부터 손상시키고, 자라난 후에는 청년 실업을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나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사회 풍조 등이 그들의 자존감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P. 41
손상된 자존감을 가지고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외모나 직장, 연봉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이미 손상된 자존감이 회복될 리 만무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랑의 결실로 축복받던 아이들의 탄생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데 본인부터가 행복하거나 만족스럽지 않으니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존감이 바닥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책을 읽고 강연을 찾아 듣는다. 최근에 <미움받을 용기>나 <자존감 수업>과 같은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이러한 현상 때문이다. 대부분의 강연자나 저자는 타인의 인정에 목을 매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역설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막상 그런 말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에는 그럴 듯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서 벗어나 다시 사회로 돌아가게 되면 사회가 강요하는 분위기와 시선으로 인해 금방 원래 자존감이 낮은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고백컨대 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가진 평균 키보다 작은 키를 가지고 살고 있다. 키가 작은 남자들은 대부분 느끼는 것이겠지만, 키는 연애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다. 작은 키 때문에 소개팅을 할 때 예선 통과를 하지 못했던 적이 수없이 많다. 이런 내가 ‘키가 작은 나를 사랑하자.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야.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평가하던지 상관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매일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자고 마음먹는다면, 과연 내 자존감이 높아질까? 아마 그 다음날 소개팅에서 거절당하고 다시 원래의 낮은 자존감 상태로 돌아올 것이 뻔하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책과 강연의 내용은 본인의 자존감을 형성하고 높이는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토록 키에 민감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높은 신발을 신지도 깔창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에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늘 높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신발을 벗는 식당에 가지 못하는 것쯤은 커다란 불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 높은 신발을 신지도, 깔창을 사용하지도 않은 이유는 몇 년 전 나를 사랑해주던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높은 신발을 신던 나에게, 우리 둘이 키가 비슷해서 좋다고, 걸으면서 눈높이가 맞아서 좋다고 했던 그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했던 그 따뜻한 이야기는 지금 서로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 채 살아오고 있지만,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자존감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랑받은 총량’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가 한 사람의 자존감을 결정한다. 물론,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높은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를 변화시켜주는 사람을 만나자. 사랑 받는 것. 내가 가진 단점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괜찮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수많은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보다, 그런 사람을 한 명 만나는 것이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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