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철론(鹽鐵論)
페이지 정보

본문
염철론(鹽鐵論) - 김원중 역
현대 경제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이론을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다.
케인즈 :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경제를 운영하자.
하이에크 : 국가는 시장을 자유롭게 놔두자. 스스로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경제학의 양대 거장이 언급되었다고 현대에 두가지 이론이 완성되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과거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지만, 국가가 경제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서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은 항상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데, 동양에서는 전한 소제(昭帝) 시절 염철론이라는 논쟁이 있었다. 한자에서 그 뜻을 유추할 수 있듯이 ‘소금(鹽)’과 ‘철(鐵)’에 대하여 토론(論)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소금과 철에 대하여 논쟁을 펼쳤던 것일까? 논쟁을 하게된 배경에 대하여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한이 성립되고 발전하는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아야 한다.
진나라의 영정이 천하통일을 완수하고 시황제가 되어 중국의 1인자로 군림하였다. 황제 1인 지배체제를 위하여 시황제가 야심차게 밀어붙인 정책은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군현제”, “도량형과 문자 통일”, “흉노 정벌과 만리장성 건설.” 3가지 정책 모두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보는데, 본인이 보기에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책은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이라고 본다. 지역마다 다른 치수, 부피, 무게의 기준과 문자를 통일하니까 전국 어디에서든지 물건을 사고 팔 때 기준이 똑같아 진다. 이러면 지역간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져서 거대한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된다. 두 번째는 ‘군현제’의 실시이다. 주나라 시절과는 다르게, 진나라는 전국 36개 군현에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직할통치하였는데, 이는 후대에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군현제는 잠시 무너졌고,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봉건제과 군현제의 중간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군국제’를 실시한다. 중앙정부가 수도권에는 관리를 파견해 직할통치하고, 지방에는 주나라처럼 제후왕을 파견해서 통치하게 하는 방식이다. 유방이 천하통일을 다시 완수하고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초한쟁패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해지고, 유방 본인이 흉노의 묵돌 선우와 싸우다 백등산에서 굴욕적인 화친을 맺으면서 중앙정부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지방을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방 사후에 여씨일파와 개국공신+유씨 제후왕들간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고, 결국 여태후가 죽고 나서 여씨들이 숙청당하면서 황제로 추대된 인물이 유방의 넷째 아들 한문제(文帝) 유항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중국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 최초의 역사적 태평성대 ‘문경지치(文景之治)’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문경지치’를 흉노에게 한나라가 눌려 지내면서 시대에 무기력하게 순응한 것을 미사여구를 붙여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한나라가 문제-경제 시절 북방의 흉노에게 수그리며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흉노랑 사생결단을 낼 수도 없었다. 초한쟁패기를 거치면서 전중국에서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해지고, 제후와 공신 및 호족들이 토지를 겸병하면서 자기들 세력을 불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서 내전으로 전국토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지주들은 토지랑 부동산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즉위한 한문제의 대응은 ‘무위지치(無爲之治)’ 이다. 쉽게 말하면 간섭을 최소화 하고, 외부와의 전쟁을 억제하면서, 자유롭게 민간의 경제 활동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우선적으로 전란을 통해 줄어든 경제의 몸집을 키우는 의미에서 실시한 경제 철학인데, 쉽게 풀어서 말하면 기업을 키우기 위한 시장 친화적인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실제 민간에서는 곡물창고가 넘쳐나고, 돈이 남아서 동전을 꿴 노끈이 썩어서 떨어져 나갈 정도라고 하였다. 여기에 세금까지 감면해주었으니 민간 경제가 신이 났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민간은 오늘날 대기업과 같은 토호와 대상인들이지 일반 백성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는 성장하지만, 부의 분배가 불평등해지고 덩치가 커진 지방 토호와 제후들이 중앙정부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물론 한문제는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동시에 병행한 정책이 제후들이 분봉을 받아 가져간 영토를 삭감하는 것과 동시에 수도권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지방관들을 중앙에서 임명해서 보내는 것이다. 물론 제후들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아서, 한경제(景帝) 시절에 ‘오초칠국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다. 그리고 한무제가 제후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추은령(推恩令: 지방 제후들은 아들들에게 영지를 똑같이 나누어 승계하라. 쉽게 말해서 잘게 쪼개서 힘을 약화 시키겠다는 의미다.)을 실행하면서 사실상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축적된 통일 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한무제가 야심차게 실행한 정책은 흉노와의 전쟁이다.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한무제는 민간의 동전 주조를 금지하여 오직 국가에서만 주조 할 수 있게 하고, 각지의 거상과 호족들을 억제하면서 경제관리들 까지 파견해서 물자의 유통까지 장악하였다. 그리고 생활에 필수품인 소금과 철 그리고 술을 국가에서 전매하여 재정 수입을 크게 확충하였다. 쉽게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조폐공사랑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화폐를 국가가 장악하고,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들에게 각종 규제와 세금 폭탄을 부과하고, 우체국과 철도까지 설립해서 유통망을 세웠다고 보면 된다. 더하여 전기와 수도를 독점해서 연간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을 대폭 늘린 것이다. 그리고 흉노를 상대로 국가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한 총력전을 수행하였다. 사람들은 한무제가 흉노 정벌에 성공하여 한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착각을 한다. 한무제의 흉노 정벌이 흉노를 쇠망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지만, 50년에 이르는 한무제 통치 기간 동안 전쟁이 벌어지면서 한나라에도 심각한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이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무제 시절에 흉노 정벌은 실패하였다. 결국 한무제 말년에 흉노 정벌을 후회하고 ‘윤대의 조칙’이라는 것을 내리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금하고 무절제한 징세를 중지하며 농업의 진작에 힘쓰며 흉노의 정벌을 중지한다.”
전쟁이 끝난다고 하니 모두가 기뻐했음이 분명하다. 한무성세(漢武盛世)를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가혹한 시절이었다. 한무제 사후 한소제 시절이 되자 국가에서 독점하던 소금, 철, 주류에 대한 통제를 민간으로 이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 한소제의 보정대신이었던 곽광이 전국의 유학자들을 수도로 불러 모아서 국가 경제 정책 및 전반적인 통치 철학에 대하여 논의하게 하였는데, 이를 모아서 엮은 것이 염철론이다. 이 때 곽광을 위시한 유학자들은 국가가 민간(호족, 대상인)과 이익을 다투는 것(여민쟁리)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서 소금과 철, 술의 전매제도를 폐지하자는 입장이었다. 한문제-한경제 시절처럼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 하고 방임하여 경제를 키우자는 시장 친화적인 내용이다. 반대로 곽광의 정적인 상관걸을 비롯한 법가의 일파는 재정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행하는 여러 정책으로 호족들을 억제하고 국방과 백성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다면서 전매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마치 현대에서
‘공기업을 민영화 시키고, 기업을 살려야 국민이 살고 나라가 산다!’
‘민영화는 무슨! 부자들을 억제하고 부의를 분배해야 국민이 살고 나라가 산다!’
와 같은 논쟁이 과거에 벌어진 것이다. 한문제의 자유방임적 질서과, 한무제의 철두철미한 국가 통제를 경험한 한나라는, 염철론을 통하여 두가지 철학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간다. 치열한 논쟁 끝에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되었고, 국가가 철저하게 탄압하고 약화시키고자 한 호족과 대상인들은 통치를 위한 협력의 수단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호족들의 위상이 증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적 상관걸을 숙청되었으며 곽광의 권력을 강화되었다. 유가와 법가의 치열한 대립은 유가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통치 철학은 유가에 두고 제도는 법가에 두는 동아시아 국가의 기틀이 확립 된 것 이다.
물론 한나라가 유학자들과 호족들의 득세를 가만히 바라본 것은 아니다. 한무제의 증손자 한선제(宣帝)가 곽광이 죽은 이후 곽씨 일족들을 제거하고, 현실에 기반한 법가주의적 통치와 정책을 수행하였다. 한선제는 할아버지 여태자가 무고를 받아 억울하게 죽었을 때 젖먹이 상태에서 혼자 살아남았고, 민간에서 자라서 호족들이 아닌 백성들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 한선제가 추진한 정책은 유가의 왕도와 법가의 패도를 적절하게 혼용한 실용주의적 통치였다. 질서유지와 공직기강 확립을 위하여 엄격한 법의 집행을 시행하면서도, 한무제 시절 무리한 원정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휴식’의 시대를 지향하였다. 중앙의 통제를 위하여 지방관들을 육성하고 파견하면서도, 백성들의 생활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내정을 펼쳤다. 외교적으로는 한무제 시절 고압적인 외교정책 보다는 주변국과 제휴를 통하여 흉노를 압박하였고, 분열된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가 항복해오면서 한나라를 다시 중흥시켰다. 100년의 실험 끝에 고대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뒤를 이은 한원제가 유교에 심취하면서 전매제도를 폐지하고, 호족세력들이 다시 발호하면서 국가가 어지러워지고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하였다. 결국 광무제가 호족들과 연합하여 다시 한나라를 세웠지만, 이전보다는 중앙정부의 힘이 많이 약해지고 지역 토호들의 세력이 성장한 상태였다. 중앙정부가 다시 제도적 경제적으로 토호들을 억제하고 통제 하게 되는 시기는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거치고, 결국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까지 가야만 했다. 이를 예견했는지는 몰라도 한선제-한원제 부자가 대화를 했는데, 한선제가 분노하면서 탄식을 했다는 구절이 있다.
"폐하께서는 지나치게 형법에 의존하고 있으니 유학자들을 등용해야 합니다." - 한원제
"우리나라가 제도를 가진 이래로 본래 패도와 왕도를 섞어 사용하였는데, 어찌 오로지 덕에만 의지하여 주나라시대의 정치만을 쫓으려 하느냐“ - 한선제
한선제는 통제되지 못한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공정하지 못하고 엄격하지 못한 법의 집행은 호족과도 같은 엘리트 기득권의 세력을 불리고 빈부격차를 늘릴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초기에는 경제의 규모를 키워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특정 계층에만 부의 집중이 일어나고 제도 역시 성장의 논리에 맞는 제도가 시행된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제도적 불평등은 경제 성장기 시절에는 문제가 되지 않고, 성장이 둔화되고 안정되는 시점에서는 양극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안정과 모순이 쌓이면서 국가적인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한 정책의 입안과 실행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정책은 투기자본과 부동산 상승의 억제와 저소득층을 위한 국가적 안정망을 구축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제도의 개선 및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 수입이 필요하다. 물론 과거의 호족들이 여민쟁리를 하지 않는게 좋다고 하는 유교적 이상을 내세우면서 국가의 간섭에 반발했듯이, 세금을 많이 내야할 부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내세우며 ‘여기가 공산권 국가냐?’라고 반발한다. 물론 국가의 지나친 규제는, 자본과 기업이 해외로 이전하게 한다거나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섭을 최소화한 지난 시간 동안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었어도, 경제적 불평등은 커져만 갔다. 부를 축적할 길이 없는 청년층은 가상화폐만 매달리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재산을 증식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동산 투자가 되어버렸다. 시장 친화적인 이론을 내세우면서 기업과 자본 그리고 토지 소유주들에게 유리하게 정책을 펼친 결과이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에 따라서 적용되는 법과 제도의 불평등 역시 아직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경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종종 사면되는 기업인과 자기들끼리 비리를 저지르고 봐주기 수사를 하는 정치-법조계의 풍토는 여전히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제는 시장과 민간에만 맡겨서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필요한 부분에 국가가 적절하게 개입하는 경제 정책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더하여, 경제적 사회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법과 제도의 불평등 역시 타파해야 할 것이다. 롤모델로 삼아야 하는 건, 한문제도 한경제도 한무제도 아니고 한선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이전글이름 모를 시인이여, 어딘가에서 내내 어여쁘소서 19.04.10
- 다음글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19.03.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