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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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바로 ‘정의’이다.”
올바른 것은 누가 판단하는가? “ 이성적인 인간이다.”
그럼 올바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공정, 자유, 분배, 공동선의 추구.”
파고들수록 복잡해지고 머리가 아픈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이던지 간단하고 명료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많은 철학자들은 정의에 (justice)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연구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정의에 대하여 정의(definition) 한다는 건 쉬운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본질적으로 선함을 추구하는 것을 정의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평등적 정의를 추구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두 철학자가 추구하는 정의는 ‘만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 개인이 공동체에 대하여 가지는 의무, 능력과 공헌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샌델은 질문을 던진다. 국경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존재하는 현대국가에서 국민과 외국인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는가? 공동체가 개인에게 지우는 의무가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가? 능력이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이쯤 되면 딜레마에 빠져 정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워진다. 현대 이전의 사회라고 해서 정의가 가지는 모순점에 대하여 모르지 않았다. 존 스튜어드 밀은 국가가 가지는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여 개인이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고 보장 받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제시하였고, 그 결과는 프랑스 대혁명 끝에 마련된 ‘프랑스 인권선언’이 되시겠다.
“법률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만을 금지하는 권리를 가진다. 법률이 금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방해할 수 없다. 또 법률이 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누구에게도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즉, 법률은 인간이 가지는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개념이 극대화 된 것이 ‘자유지상주의’와 ‘자유의지주의’이며, 미국의 공화당이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는 개인과 시장의 자유에 대하여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극단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여기 두사람이 있고,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식인행위를 했다. 행위 자체만 놓고 본다면 모두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잡아먹힌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식인행위에 대하여 자신의 자유 의지로 동의했다면? 대중들은 여전히 불편하겠지만 처벌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이를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자유주의가 사회적 모순에 맞닥드렸을 때 가지는 딜레마라고 볼 수 있다. 샌델은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생명과 신체를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고통 받는 말기암이나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라면? 위 사례와는 정반대로 국민의 2/3이 동의를 한다. 차이점이라면 불가항력적인 고통의 존재 유무이며, 나머지는 당사자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합의와 자유의지에 따른 식인행위에는 부정적이고, 불치병에 의한 안락사에는 긍정적인 대중에 인식에는 과연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지 궁금해지는 사례들이다.
이 때문에 칸트는 정의를 추구하는 자유에 대하여 엄격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단순히 쾌락만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면 짐승과 다를바가 없다. 오직 욕구의 노예일 뿐이고, 그저 외부의 자극에 따라서 움직이는 타율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외부에 자극에 의해서 움직이는 목적의 도구가 아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존엄성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는 행동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을 하게 만든 동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에 따라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두가지 사례에 대하여 판단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식인행위의 사례는 그저 아무런 의미와 동기도 없이 일어난 부도덕한 일이고, 불치병의 사례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동기가 있는 도덕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도덕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난감해진다. 그저 쾌락만을 추구하기 위한 인간의 행동은 짐승과 다를바가 없다고 했는데, 과거와는 다르게 남녀간의 관계가 자유로운 현대사회에서는 과연 이런 잣대로 비난할 수 있을까? 그저 두 사람이 합의하였고,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자유롭게 관계를 맺었을 뿐이다. 여기에 현대사회에서 남녀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불륜은 제외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뭐라고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불륜을 저질러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운 부인과 결혼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대통령 개인의 사생활이고 남한테 피해를 준건 아니잖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신경 꺼야지.”
자유의 국가라는 지극히 ‘프랑스’스러운 반응이다. 이처럼 자유와 도덕은 정의안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나아가는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또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여기 A와 B가 있고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A는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좋은 교육과 환경에서 성장해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B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한 교육을 받고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A와 B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했고 다른 결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도덕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정의로운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공정한지를 살펴봐야 하는데, 관점에 따라서 공정할수도 아닐수도 있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개인이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얻은 성취이기 때문에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평등과 기회 균등의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사회적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존 롤스가 본다면 사회에서 처음 지위나 상태와 관계없이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 되기 때문에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 할 것인지 대한 문제로 연결 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누구나 필요하다고 동의한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우대에 대해서는 엇갈린 시선이 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고, 경제적 취약층에 대한 배려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정부가 시행하는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보는 시각이 있고,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반발하는 시각이 있다. 신기하게도 저소득층의 복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여론이 있는데, 인종이나 여성할당제 같은 소수자 우대 제도에 대한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봤을 때, 롤스가 했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처음의 지위나 상태에 관계 없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경제적 문제는 사회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불평등은 후천적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상태이지만, 인종 성별 같은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소수자를 우대하는 것은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며 저항감이 커지게 된다.
이처럼 정의라는 것은 간단한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인과 사회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개인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경직시킨다. 개인을 위한 자유주의적 정의는 개인의 권리를 극대화하지만 사회적 안정성을 해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수를 제외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공동체를 위한 정의는 공동의 선이라는 명목아래 개인의 희생을 용인하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로 달려간다. 도덕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결국 정의란 개인의 자유, 공동의 선, 보편적인 도덕에 대한 합의와 고려가 들어가야 한다. 이 세가지 요소는 시대가 바뀔수록 변하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요소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들이다. 결국 끊임없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그 시대에 맞는 정의를 사회 구성원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시민으로서 살기 참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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