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 – 엘리너 캐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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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 엘리너 캐턴
이규섭
소설 ‘리허설’은 독특한 구조로 쓰여있다.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장면이 휙휙 전환된다. 그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손을 잡아 이끌리는 독자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는 소년처럼 낯선 장면들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초조해진다. 정신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면 삶을 배역으로 볼 것인지, 배우의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타인에 대해 파악할 때,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 전해 들은 것들을 토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뿐이다. 가만히 보면 이는 극의 등장인물을 파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연극을 보는 우리는 그 배역은 쉬이 이해할 수 있지만, 배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여학교의 음악 교사인 살라딘 선생이 학생인 빅토리아에게 손을 대었다는 소문이 퍼진 시점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충격적인 소문은 그 지역 일대를 어수선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조용한 웅성거림이다. 기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물들인다. 살라딘의 행동이 범행이라면 빅토리아는 분명 피해자다. 어른들은 쉬쉬하면서 빅토리아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날을 전후로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모두가 빅토리아를 곧 깨질 것 같은 유리 조각상처럼 대한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살라딘이 그만둔 뒤에도 살라딘과의 밀회를 이어간다. 어른들이 항상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학교 안의 세계, 그 닫힌 세계를 살아가는 소녀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도 중심적인 화젯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건은 소녀들의 집단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른들의 기대와는 다르다. 어떤 학생은 살라딘이라는 매력적인 선생의 사랑을 뺏어간 것을 질투했다. 내심 자신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상대라고 여겼던 소녀들이 있다. 어떤 소녀들은 그녀의 이미지를 부러워했다. 그녀의 배역을 탐했다. 그건 매력적인 사람의 상대라는 점에서일 수도 있고, 그녀들이 가지지 못한 경험을 먼저 가졌다는 것일 수도 있으며, 어떤 금단의 영역에 도달한 것에 대한 질투일 수도, 그러한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것에 대한 질투일 수도 있다. 어른들의 눈에 범행이었을 뿐인 사건이지만, 소녀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이 삶의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밀려버린 사건이었고, 자신들이 가져야만 하는 무언가가 한 소녀에게 주어진 불공평한 사건이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본디 자신들이 가졌어야 할 것이었다.
“이건 불공평해”
빅토리아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쭈그리고 앉아 가려진 여자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분노했다.
“걔가 우리한테서 다 훔쳐갔어. 이건 불공평해.”
빅토리아의 여동생 이솔드는 그러한 언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소녀다. 분명 다른 이들이 보는 시선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그녀는 언니의 태도가 불만족스러웠다. 언제나 한 발짝 앞에서 지나가고, 자신은 그 뒤를 좇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빅토리아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없었지만, 빅토리아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훌쩍 넘어가 버린 언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때로는 언니와 비슷하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피해자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에서 무언가 기대하듯이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불편했다. 원하지 않은 관심은 그녀에게 혼란을 줄 뿐이었다.
이솔드가 원하지 않는 강렬한 배역에 내정되어 버린 인물이라면, 스탠리는 개성이 없는 배역으로 인해 고민하는 인물이다. 스탠리는 자신의 몰개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나, 매번 다시금 몰개성의 원점으로 돌아오며 열등감에 빠져 고뇌한다. 가끔 만나는 아버지와의 식사에서 그의 불안함과 열등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매번 조언을 구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답변만을 내놓는 괴짜 심리학자 아버지에게 그는 불만을 표한다. 결국 그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사고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과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의 삶. 그것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비참함을 드러내고, 자신을 비극적인 인물로 만들며 자신의 개성을 찾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솔드와 스탠리다. 그들은 배역을 받지 못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한다. 소설은 어른이 되는 과정을 자신이 연기할 배역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빅토리아처럼 그 기대에 부응하기도 하고, 이솔드처럼 그 기대에 한 방 먹일 수도 있다. 스탠리처럼 방황할 수도 있으며, 브리짓처럼 맞지 않는 배역에 목메다가 자신의 얼굴을 찾지 못한 채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
배역과 배우는 무관하지 않다. 배역은 그 배우가 받아들일 역량이 되어야 하며, 한 명의 배우가 반드시 하나의 배역을 맡을 필요도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분명히 매일을 연기하고 있다. 상대와 상황과 장소와 시간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주위로부터 기대되는 모습을,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타인의 기대를 자각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된다. 인물의 삶은 배역으로서의 삶과 그 배우로써의 삶이 복잡하게 얽힌 블렌딩 티와 같다. 그것이 반드시 아름다운 형태일 수는 없지만, 분명 어떻게 우러나는지에 따라 다양한 향과 풍미를 자아낸다. 속이 빤히 보이는 순수함에서 벗어나 ‘묘하게 알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성숙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한 리허설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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