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력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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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배신>
- 조한혜정, 엄기호 외
최근에 미세먼지가 전국에 만연하다. 숨만 쉬어도 목이 따갑다. 마스크 없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예전의 파란 하늘과 그 안에서 맑게 빛나는 태양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우중충한 날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현재의 우리나라가 그렇고 지금의 청년들이 처지가 그렇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청년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취업준비생은 취업 준비생대로 미래에 대한 걱정이 크다. 변화의 속도가 급속하게 빨라지고 있는 지금, 자신도 한순간에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는 일이다. 가슴이 뛰는 일 대신 청년들은 안정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다. 각박한 세상에서의 안정은 곧 생존을 의미했다. 많은 청년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량진으로 갔고, 교사와 같은 안정적인 직업이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다.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이 보장되는 과에 지원자가 몰렸다.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청년이 골방에 틀어박혀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는다.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졌다는 청년들이 취업을 위해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수년을 준비한다. 얼마 되지 않는 자리에 수많은 사람이 몰리니 경쟁은 치열해졌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패배자를 만든다. 사회에서 선택받지 못한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도태되기 시작했다. 실패했을 때 사회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한 번의 실패는 곧 몰락을 의미했다.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된 청년들을 보살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하라고 강요했다. 모든 사회의 불합리함을 무시한 채 오로지 젊은 혈기와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어른들의 불합리한 태도는 오히려 청년들에게 반감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반발에 힘입어 몇몇 청년들은 어른들이 말하는 노력이라는 단어를 ‘노오력’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사회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즈음에 청년들은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며 냉소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남아도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자본주의가 청년들을 훈련을 통해 어떻게든 사회에 통합시켜 노동력으로 부리려고 했다면, 오늘날에는 그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체제의 입장에서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준비가 되지 않은 존재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취직이 되지 않는 이유가 충분한 일자리가 없어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아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 ‘잉여’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로 ‘냉소’였다. 근대가 약속했던 연속적이고 성장하는 서사성을 갖춘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꿰뚫어보았다. p. 10
청년들에게 ‘노력’은 어느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되었다.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사회인데도, 사회는 그들에게 왜 실패했냐며 질책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사회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했다. 아무리 사회의 불합리함을 이야기한들 남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여전히 실패자였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편이 마음 편해서였으리라. 그 결과 청년들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냉소주의는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져 있다. 특히 익명을 가지고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 경향이 심하며, 인터넷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들의 언행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노력하는 것은 어느새 바보 같은 짓이 되어버렸다.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공할 수 없다는 기저에서 ‘금수저, 흙수저’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좌절감을 수차례 겪어본 이 시대의 청년인 나로서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이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애초에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널리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제대로 도전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차피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비방한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어차피 노력해도 안 돼. 타고난 부모나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성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쓸데없고 무지한 것으로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노력하지 않음을 정당화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노력하지 않는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패배자인 것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타고나지 않은 집안에서 자라 이 시대의 각박함과 치열함을 겪고 있는 20대 후반의 청년이지만 그들처럼 무작정 노력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노력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고백건대 나는 어느 분야에서도 그다지 재능이라는 것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보다 왜소한 몸집을 가지고 태어났다. 가끔 작은 몸으로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축구 할 때, 패스를 하면 절반은 이상한 방향으로 공이 갔고, 그런 이유로 친구들에게 거의 패스를 받지 못하는, 그런 운동신경을 가지고 태어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찬 공은 항상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때문에 팀을 꾸릴 때면 항상 제일 마지막에 뽑혔다. 이런 내 발이 원망스러워 체육시간에 축구 말고 농구를 한 적도 있었으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운동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경기 중에 공을 받지는 못해도 열심히 뛰어다녔고, 골은 거의 넣지 못했지만 덕분에 좋은 지구력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 체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축구나 농구처럼 남들과 경쟁하는 운동이 아닌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요가처럼 스스로를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운동을 했다. 왜소한 몸집을 가지기도 했고 살면서 꾸준히 운동을 하지 않은 터라,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 수 있는 바벨의 무게조차 나에게는 힘겨운 것이었다. 요가 클래스에서도 옆 사람이 하는 기이한 자세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신체였지만, 꾸준한 노력은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보상을 주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이제는 평범한 사람이 들 수 있는 것 이상의 무게를 들 수 있고, 제자리에 서서 허리를 굽혔을 때 바닥에 손바닥이 닿을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질 수 있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다지 놀라운 성과는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큰 변화였다. 일 년 이상의 꾸준한 운동은 내가 정말 재능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축구에서도 변화를 주었다. 절반 이상 실패했던 패스는 그래도 꽤 적중률이 높아졌고, 가끔 운이 좋아 골을 넣은 적도 있었다. 물론, 우리 연구실에서 축구에 재능이 있는 몇몇 학생처럼 현란한 개인기로 수비수 몇 명을 제치고 혼자 공을 몰고서 멋진 골을 넣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예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는 엄청난 변화였다. 내가 만약 운동에 재능이 없다고 운동과 담을 쌓아버렸으면, 이러한 성취감을 절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의 노력은 그 재능만큼의 큰 성과를 내고, 평범한 사람의 노력은 그 평범한 수준만큼의 성과를 낸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하버드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축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누구나 메시나 호날두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벼락치기라도 열심히 한다면 충분히 한 과목에서 10점 정도는 올릴 수 있고, 꾸준히 축구연습을 한다면 동네 축구에서 멋있는 골을 한 번 쯤은 넣을 수 있다. 노력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최소한 그 정도의 열매는 보장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문제를 노력이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나도 정말 세상을 살다보면 주어진 환경 자체가 나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게 된다. 내가 끊어질 듯한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겨우 절벽을 조금씩 기어오를 때 그들은 수많은 안전장치를 착용하고 손쉽게 암벽을 오르거나 심지어는 헬리콥터를 타고 손쉽게 정상에 올라간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세상이 원망스럽고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나는 49cc 스쿠터에 만 원짜리 엔진오일을 넣을지 2만 원짜리 엔진오일을 넣을지 고민하는데 돈이 많은 부모를 만난 친구는 외제차를 끌고 나타난다. 그때의 박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불공정한 세상을 비난하고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불평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해야겠는가. 왜 나는 저러한 재능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고 신에게 불평이라도 해야할까.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면서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불행해지는 방법은 잘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세상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책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모든 실패를 노력의 부족이라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지도 않다. 분명 청년들이 실패했을 때,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사회 안전망이 필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청년들이 처음부터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런 안전망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실패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청년들이 자기들만의 세계에 자기를 가둬놓고 스스로를 불행과 좌절 속에 가둔다는 것이 애석하고 또 안타깝다. 저기 앞에 존재하는 위대한 산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 그보다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한 걸음들이 모여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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