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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필립 K.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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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5,866회 작성일 18-10-0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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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필립 K. 딕

이규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좀 더 엄밀하게, 우리는 우리의 어떤 요소로부터 스스로가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인간이란 어떤 이상적인 모습,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 존재 자체를 말한다. 우리는 보통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미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전제하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은 삶인가 따위의 고민을 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먼 미래의 이야기다.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지구에서 많은 사람은 화성으로 이주하고, 안드로이드가 발전하여 사람과 구분이 어려운 사회다. 주인공 릭 데커드는 범죄를 저지른 안드로이드를 잡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소설은 화성에서 인간을 죽이고 탈출한 신형 안드로이드 6기를 잡으러 다니는 릭 데커드를 좇으며 진행된다. SF영화의 고전으로 취급되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인 본 작품은 안드로이드의 존재를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되묻는다. 작가는 결국 ‘공감 능력’의 차이를 통해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조금 아쉽다. 거미의 다리가 왜 8개인지 알 수 없다며 거미 다리를 하나씩 자르는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정말 섬뜩했지만, 그것만으로 그 존재를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순 없는 것 같다. 사이코패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역시 이상적이지 않다뿐이지 인간은 맞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최근 나오는 각종 SF 영화에서 주장하듯이 인간이 추구하는 로봇의 궁극적인 형태는 결국 독립적인 인간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학습능력이 있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조금의 결함이 있더라도 엄연히 하나의 인격체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왜 인간과 같은 로봇을 원하는지 의문이 든다. 인간과 같은 형태의 로봇은 특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간 형태가 생물학적으로 궁극의 진화 형태도 아니거니와 로봇이 제공할 서비스를 위해서도 최적의 형태는 아닌 것 같다.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른바 인공지능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인간처럼 대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인간과 같음’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실 모르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때 과학상상화 대회가 열렸다 하면 한 반에 하나씩은 꼭 보이는 그림이 있었다. 아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로봇과 그 옆에서 방긋 웃는 아이의 모습. 물론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의 첫 번째 의의는 다른 여타 기술들이 그러하듯 기존에 할 수 없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데 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연산을 해내고, 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듯, 현대인에게 있어 로봇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돕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때로는 숙제를, 때로는 청소를,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대신 해주는 존재를 아이들은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에 기술에 대한 이 두 가지 기대는 서로 상충한다. 신체 능력이라고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물리적 능력뿐 아니라 사고능력의 범주에서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존재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면서 돕는 일만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겠는가. 그들이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공포심이 먼저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로봇을 만들면 안 된다’ 라던가 우리가 원하는 로봇의 궁극적인 형태는 인간과 같으니 ‘지금부터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결국 내가 느낀 것은 인간이 노예를 원하는 마음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꽤나 재미있는 해석이라 생각한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로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욕망은, 기술의 발전으로 다시 한번 그 욕망을 합리화시켜줄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인간은 편리한 삶을 원하고, 지금까지 과학과 기술은 도구의 형태로 이를 만족시켜 왔다. 그러나 간과한 것은 인간은 망치를 만들어준다고 만족하지 않고, 망치와 함께 이를 사용할 사람까지 같이 줄 때 더 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사라진 것이 얼마나 최근인지를 생각해보면 그럴 듯하지 않은가. 인간의 정의가 모호한 지금, 기술의 발전은 좋은 여지를 주었다. 생체가 아닌 대상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를 인간이라 정의하는 것은 기존의 종교적 윤리적 사상이 만연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의견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새로운 형태의 노예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유례가 없는 궁극의 성능을 지닌 노예를 말이다.


 문명 자체가 과학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과학기술은 언젠가부터 인간의 수요를 따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초과학마저도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연구를 더욱 높게 취급하지 않는가. 과학자의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면서도, 그 근거는 결국 인류의 멸망이라던가, 다양한 부작용 등 현실적인 문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리적 문제라는 것이 그런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안드로이드가 발전한다고 해서 인류가 멸망하고, 전쟁이 만연할 확률은 낮을지 모른다. 여지껏 그래왔듯 과학자들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갈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을 때 혹시라도 앞서 내가 제시한 해석이 타당한 것이라면, 결과가 어떻든 그 연구의 방향이 상당히 불순한 것이 아닐까.

그 어느 시대보다도 과학자가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병행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안드로이드 개발업체 사장이 말하듯, 수요가 있는 기술은 ‘내가 아니라도 어차피 누군가가 언젠가 개발할 것’이다. 또한, 불확실한 우려로 지적 탐구를 멈추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연구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하는 연구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그리고 나아가 어떤 동기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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