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짐과 헤맴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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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 라쉬 - 『두 번째 지구는 없다』 를 읽고
오늘 남긴 이 글 또한 훗날 다시 읽었을 때, 연구를 막 시작하던 때의 내가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의심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자신이 환경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건, 누구라도 당장 말을 꺼내고 너나없이 당장 행동해야 할 만큼 지구의 상황이 절박해서이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못 낼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 마음으로 작은 용기를 낸다.” - 작품 중.
환경을 이야기하면 종종 그 사람의 일관성부터 따진다. 환경을 걱정하면서 비행기를 타거나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사람은 위선자라는 식이다. 물론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만 발언할 자격이 있다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면 변화는 언제 시작될 수 있을까.
동대구역에는 기후 시계가 있다. 본가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시계다. 학부 새내기 때만 해도 7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3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서서히 온도가 오르는 양동이 속 개구리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자는 양동이에 갇혀 좀비처럼 변한 개구리를 예로 들며, 자연을 잊은 인간도 괴물이 되어 살아가는 듯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가 인상적인 이유는 환경 파괴를 바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훼손되는 동안 인간 역시 그 상태에 익숙해져 간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곧 증상이다.
저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익숙한 표현 하나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 존재, 우리가 만든 모든 문명은 자연 안에 있기에 자연의 질병은 반드시 인류의 파멸로 돌아온다. 자연은 '공존'을 말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살펴야 할 우리의 보금자리이다.” - 작품 중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려서 나 역시 그 표현 자체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공존이라는 말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된 존재라는 인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였까. 인간이 있고 그 바깥에 자연이 있으며, 인간은 자연을 보호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자연을 우리가 속한 터전으로 바라보면 논리는 달라진다. 자연을 보호하는 일은 나와 무관한 대상을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터전을 돌보는 일이며, 그 터전이 무너질 때 나 역시 그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보호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된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것은 새로운 지식보다 질문의 방향이었다. 자연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내게 저자는 그 전제부터 되물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 나 역시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제대로 질문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석사 과정에 들어오면서 나는 연구를 모든 단계를 완벽하게 마친 뒤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충분히 알고 확신할 때 비로소 의견을 낼 자격이 생긴다고 여겼다. 그러나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못 낼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으며, 부족함을 이유로 질문을 미뤄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설익은 질문과 틀릴 가능성이 있는 가설도 말하고 검증받는 과정에서 다듬어질 수 있다.
양동이 속 개구리는 연구자에게도 경계해야 할 모습이다. ‘원래 다들 이렇게 한다’는 관행에 익숙해지면 질문하는 감각마저 무뎌질 수 있다. 신입생인 나는 아직 낯선 것이 많지만, 그 낯섦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지나친 부분을 다시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방법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먼저 배우고 충분히 이해한 뒤 질문하는 것, 익숙함에 무뎌지지 않되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 지금 내가 배워야 할 균형은 그 사이에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대학원생으로 보내는 시간이 청춘의 낭비라고 말하기도 한다. 불확실한 결과를 위해 오랜 시간을 쏟고도 그만한 성과를 얻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청춘이기에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에 배우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며,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에도 시간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이 반드시 낭비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청춘은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패기가 있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오늘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헤매 보았을 것이다. 부디 조금 더 무뎌진 사람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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